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리우 콜루나 (문단 편집) === 클럽 경력 === 마리우 콜루나는 [[모잠비크]] 인하카에서 포르투갈인 아버지와 모잠비크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운동 신경이 뛰어났던 콜루나는 모잠비크에서 [[SL 벤피카]]의 지원을 받는 제휴구단 데스포르티보 로렌수 마르케스에서 유소년 선수로 활약하였으며 그렇게 벤피카의 눈길을 끌더니 1954년 마침내 19살의 나이에 벤피카에서 프로 선수로 데뷔하게 된다. 콜루나는 당시 벤피카 첫 시즌에 [[인사이드 포워드]]로 뛰면서 프로 데뷔 첫 시즌만에 바로 두 자리수가 넘는 14골을 득점하는 등 엄청난 대활약을 펼쳤고, 자신의 첫 [[프리메이라 리가]] 우승까지 경험하게 된다. 이런 대형 유망주인 콜루나에게 벤피카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이후 두 번째 시즌을 맞이하자 당시 팀의 감독이였던 오토 글로리아 감독은 다재다능한 콜루나의 포지션을 미드필더로 변경한다. 그리고 [[공격형 미드필더]] 또는 [[중앙 미드필더]]로 뛰면서 완전히 포텐을 터트리게 되는데, 미드필더로 뛰게 되니 자신의 주된 장점인 뛰어난 체력과 피지컬이 크게 돋보였으며 정확하고 강력한 중거리슛과 화려한 기술들까지 맘껏 뽐내기 시작한다. 벤피카는 1959년 팀에 새롭게 부임한 벨라 구트만 감독과 콜루나를 비롯해 주제 아구아스, 주제 아우구스투와 같은 월드 클래스 포워드들을 바탕으로 [[프리메이라 리가]]를 지배했고, 1960-1961 시즌에는 [[유러피언컵]] 결승전 [[FC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중거리 슛 득점까지 성공한다. 콜루나의 득점포를 비롯해 벤피카는 총 3골을 기록하며 바르셀로나를 3:2로 격파하였으며 결국 자신의 첫 번째 유로피언 컵 우승을 차지한다. 이후 1961-1962 시즌 새롭게 특급 유망주 [[에우제비우]]가 등장하고 콜루나는 에우제비우와 함께 벤피카를 이끌면서 [[유러피언컵]] 결승전에 다시 한번 진출한다. 그리고 1961-1962 시즌 [[레알 마드리드 CF]]와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페렌츠 푸스카스]]에게 [[해트 트릭]]을 얻어맞았으나 콜루나가 3:3을 만드는 동점골을 기록하고 [[에우제비우]]가 5분만에 2골을 성공시키며 5:3 대역전승을 거두게 되면서 유로피언컵 2연패 달성은 물론 유럽 축구를 지배하던 레알 마드리드 시대의 종언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 시즌 이후 [[벨라 구트만]] 감독은 연봉 협상 관련해서 고위 관계자들과의 마찰로 팀을 떠났고, 구트만은 벤피카를 떠나면서 [[구트만의 저주|벤피카는 100년 동안 유럽 대항전에서 우승하지 못할 거라고 저주한다.]] 하지만 당시 이 말은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왜나하면 [[에우제비우]]와 콜루나가 이끄는 벤피카를 멈춰 세울 팀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62-1963 시즌 벤피카는 유러피언컵 3연패 달성에 도전했으나 [[AC 밀란]]에게 패해, 준우승에 그쳐 3연패에 실패했고, 1964-1965 시즌에는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에게 패해 준우승에 그쳤다. 이후 1967-1968 시즌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는 [[보비 찰튼]] - [[데니스 로]] - [[조지 베스트]]가 이끄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에게 연장 접전 끝에 4:1로 패배하여 결국 3번이나 준우승에 그쳤고 [[구트만의 저주]]는 2000년대 이후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콜루나는 [[1970년]]까지 벤피카에서 [[포르투갈 프리메이라 리가]] 우승 10회 달성, 포르투갈컵 우승 6회, 유로피언컵 우승 2회를 차지하였고, 이후[[올랭피크 리옹]]에서 새롭게 둥지를 틀어 1년 동안 뛰다가 [[1972년]]에는 에스트렐라 포르탈레그레에서 자신의 축구 선수 인생을 끝마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